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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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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건축은 지리적 환경, 역사적 배경, 종교적 신념, 건축 양식, 건축 기술 및 장식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바위가 많고 해안선이 깊숙이 들어간 지형은 석재를 주요 건축 자재로 사용하게 했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건축 기술이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건축은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세 가지 주요 양식으로 구분되며, 각 양식은 기둥머리, 엔타블러처, 프리즈 등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보인다. 신전, 극장, 아고라 등 다양한 건축 유형이 존재했으며, 건축 조각은 건축물의 중요한 장식 요소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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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건축
개요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60–406년)
에레크테이온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기원전 421–406년)
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 기둥
도리스 양식(왼쪽 3개), 이오니아 양식(중앙 3개), 코린트 양식(오른쪽 2개) 기둥
활동 기간기원전 900년경–서기 1세기
국가그리스 본토
펠로폰네소스반도
에게해 제도
아나톨리아
식민지
특징
재료석회암
대리석
테라코타
치장 벽토
구조기둥
들보
벽돌
치장 벽토
양식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다른 이름고전 건축
영향
영향 받은 건축고대 로마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
비잔틴 건축
상세 특징
특징비율과 균형 강조
기하학적 비율
광학적 보정
장식
주요 건축물
신전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나 니케 신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극장디오니소스 극장
에피다우로스 극장
기타아고라
스토아
프로필라이아
스타디움

2. 지리적 영향

그리스 본토와 섬들은 매우 바위가 많고 해안선이 깊숙이 들어가 있으며, 큰 숲이 적고 바위가 많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건축 자재는 돌이었다. 석회암은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공하기 쉬웠다.[69] 본토와 섬들, 특히 파로스와 낙소스에는 고품질의 흰 대리석이 풍부하다. 이 미세한 입자의 재료는 고대 그리스 건축의 정밀한 세부 조각 장식에 크게 이바지했다.[70] 아테네 근처를 비롯해 그리스와 섬 전역에 걸쳐 높은 품질의 도자기 점토가 매장되어 있었다. 점토는 도자기 그릇뿐만 아니라 지붕 타일과 건축 장식에도 사용되었다.[71]

그리스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가 해풍에 의해 누그러진다. 덕분에 많은 활동이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생활방식이 나타났다. 신전은 언덕 꼭대기에 배치되었으며 건물 외관은 집회와 행렬의 시각적 중심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극장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연적으로 경사진 부지를 활용해 건축되었다. 건물 둘레나 마당을 둘러싸는 주랑은 태양과 갑작스러운 겨울 바람을 피하는 공간이 되었다.[70]

그리스의 햇볕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독특한 특성 발전에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리스의 빛은 종종 매우 밝으며, 하늘과 바다가 생생한 파란색이다. 맑은 빛과 선명한 그림자는 풍경, 옅은 바위 돌출부와 해안선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선명함은 색조가 다양한 안개로 교차된다. 이러한 특성 환경에서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정밀한 세부 묘사가 두드러지는 건축물을 건설했다.[70] 반짝이는 대리석 표면은 매끄럽고, 곡선지며, 홈이 파여 있거나 화려하게 조각되어 햇볕을 반사하고, 점진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루의 변화무쌍한 빛에 따라 색깔이 변했다.

아티카 람누스의 들쭉날쭉한 해안선


델포이의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아폴로 신전과 극장


아테네아크로폴리스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3. 역사적 배경

역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900년경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원전 323년 사망까지)와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년 – 서기 30년)의 두 시대로 나눈다.[1]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건축의 실질적인 작품들이 기원전 6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시대 후기에는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지역 정복과, 이후 그리스 문화의 많은 부분을 채택한 로마 제국의 부상으로 인해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었다.[10][7]

###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번성했다. 미노아 문명은 미노아 궁전과 해양 생물의 모티프로 그려진 도자기로 유명하며, 미케네 문명은 성채, 요새, 무덤을 건설하고 문어와 해초 대신 행진하는 병사들로 도자기를 장식했다.[8] 이 두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에 멸망했는데, 크레타는 화산 폭발로, 미케네는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멸망했을 가능성이 있다.[8] 이러한 사건 이후에는 마을 수준의 문화만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으며, 이 시기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부른다.

### 폴리스 시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는 폴리스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중앙 집권화나 사회 제도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신분 장벽이 낮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건축에 관해서도 거의 암중모색의 상황이었지만, 고전기에 계승될 건축적 기반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18]

일반적인 그리스 신전과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초에는 형성되었지만, 당시의 건축 재료는 목재였다. 폴리스의 사회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종교적, 공적 건축이 발달했으며, 기원전 6세기 중기에는 건축 재료로서 본격적으로 돌이 사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는 도리아식이 발전하고,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식 건축이 각각 발전했다.[10][7]

###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은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번성했던 문화이다. 미노아 문명은 미노아 궁전과 해양 생물 모티프가 특징이며, 미케네 문명은 성채, 요새, 무덤을 건설하고 문어와 해초 대신 행진하는 병사들로 도자기를 장식했다.[8] 이 두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에 멸망했는데, 크레타는 화산 폭발로, 미케네는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멸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건 이후 그리스 암흑기가 도래했다.

기원전 8세기 초기에는 일반적인 그리스 신전과 같은 형식의 건축물이 형성되었지만, 당시 건축 재료는 목재였다.[18] 기원전 6세기 중기에는 건축 재료로 본격적으로 돌이 사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는 도리아식이,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식 건축이 각각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식은 스타일로바테스 위에 직접 원주가 올려지기 때문에 기반을 갖지 않으며, 주두는 원형의 접시형 에키누스와 사각형의 아바쿠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63]

기원전 570년경 시라쿠사이의 오르티기아 섬에 건설된 아폴론 신전은 구조가 석조로 바뀐 최초의 그리스 신전 중 하나이다. 기원전 520년에 기공된 셀리누스의 G 신전은 폭 49.5m, 깊이 108.9m의 거대한 신전이다. 기원전 565년 혹은 기원전 530년경에 건설된 파에스툼의 제1 헤라 신전은 정면의 원주가 홀수(9개)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의 축에 한 줄의 열주가 통하는 모양새였다.

그리스 본토에서의 도리아식 건축은 기원전 7세기경, 아직 건축이 목조였던 시기에 완성되었다. 코린토스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585년경 혹은 기원전 580년경에 건설된 케르키라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석조로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 신전 중 하나이며, 페디먼트를 조각으로 장식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3. 1.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영향

미케네 그리스와 미노아 문명의 건축은 고대 그리스 건축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두 문명이 몰락하면서 많은 기술과 양식이 사라졌다.[69]

미케네 건축은 왕궁이 있는 성채를 둘러싼 거대한 성곽이 특징으로, 미노스 문명의 넓은 '궁전'들보다 훨씬 작고 다른 건물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메가론은 중앙에 난로가 있는 직사각형 홀로, 궁전과 큰 집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일반적으로 석재 기초 위에 햇볕에 말린 벽돌이 사용되었으며, 목재 기둥과 지붕 대들보도 사용되었다. 일부 중요한 장소에서는 벽의 기초를 따라 정교하게 다듬은 절단석으로 된 오르토스타테스(직립석)가 줄지어 배치되기도 했다.[72]

크레타의 미노스 건축은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기둥과 보를 사용하는 형태였다. 미노스 건축에서도 목재 기둥과 기둥 머리를 사용했지만, 목재 기둥은 도리스식 기둥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아래가 좁고 위로 갈수록 넓어졌다.[73] 그리스에서 가장 초기 형태의 기둥은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미노아 건축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의 주거 건축물은 주로 주랑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이나 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형태는 신전 건축에서도 열주실을 건설하는 데 적용되었다. 그리스 건축은 거대한 주거 건축물이 발전한 크레타와 달리 무엇보다 신전과 같은 공공 건물 위주로 발전해왔다.[67] 다만 크레타의 '궁전'들이 실제로 주거용이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일부 미케네 무덤은 돔 구조의 특성을 보이는데, 돌을 평평하게 쌓아 올려 점점 좁아지는 모양이다.[73] 이러한 건축 양식은 고대 그리스 건축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400년경 큰 기념비적 무덤의 내부, 예를 들어 크니도스의 사자 무덤(기원전 약 350년)에서 다시 나타났다.

역사적, 지리적 관계를 고려할 때, 고대 그리스의 건축 활동은 기원전 2000년경의 미노아 문명 중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스 본토에서는 기원전 1400년경의 미케네 문명을 발상으로 한다. 그러나 크레타의 건축과 미케네 건축, 그리고 그리스 건축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성이 인정되지만, 그 관련성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으며, 그리스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축은 기원전 8세기경이 출발점이라고 생각된다.

3. 2. 폴리스 시대의 건축 발전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는 도시 국가(폴리스)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중앙 집권화나 사회 제도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신분의 장벽도 낮아 활기 넘치는 교류가 활발했다고 여겨진다. 건축에 관해서도 거의 암중모색의 상황이었지만, 고전기에 계승될 건축적 기반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18]

일반적인 그리스 신전과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초에는 형성되었지만, 당시의 건축 재료는 목재였으며, 오늘날 그것을 완전히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폴리스의 사회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종교적, 공적 건축이 발달하는 것을 엿볼 수 있으며, 기원전 6세기 중기에는 건축 재료로서 본격적으로 돌이 사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는 도리아식이 발전하고,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식 건축이 각각 발전했다.[10][7]

그리스 건축의 전통은 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남이탈리아에서 발상한 도리아식과 소아시아 일대를 발상지로 하는 이오니아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오니아식은 소아시아에 그리스인이 이주한 기원전 12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되지만, 기원전 6세기에 소아시아에서 건설된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구 신전과 사모스 섬의 헤라 신전(제 III 신전)이 그 의장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신전들은 현존하지 않아 발굴된 유구에서 신전의 형태를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둘 다 이중 주주식 신전(디프테랄)으로, 매우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비트루비우스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헤라 신전은 건축가 로이코스와 테오도로스가, 아르테미스 신전은 크레타의 케르시프론과 그의 아들 메타게네스가 설계를 진행했지만, 아르테미스 신전에는 헤라 신전을 계획한 테오도로스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양 신전에 공통성을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8]

시프노스인의 보물고의 장식
카리아티스(여성상 독립 기둥)와 간구의 장식. 카리아티스는 아르카이크 양식에 가깝다.


여신헤라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사모스 섬의 헤라 신역(헤라이온)의 기원은 오래되어, 최초의 제 I 신전(통칭 헤카톤페이돈(백척 신전), 장변 60m, 단변 30m)은 기원전 8세기 초기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8세기 말에 내진을 정면 7개, 측면 8개의 기둥으로 둘러싸는 증축이 이루어져, 그리스 세계 최초기의 주주식 신전이 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660년경에 홍수로 파괴되었지만, 곧 동일 평면의 제 II 신전이 건설되었다. 제 III 신전은 기원전 570년부터 기원전 560년경에 재건된 것으로, 장변 104m, 단변 52m, 104개나 되는 원주로 내진을 2중으로 둘러싼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기둥의 배치는 내진의 기둥 위치와 완전히 일치하여, 신전이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61]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장소도 유래가 오래되어,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이 신역의 기원은 이오니아인 이주보다 오래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560년부터 기원전 550년경에 건설된 이 신전은 헤라 신전보다 한 바퀴 더 크고, 장변 114m, 단변 54.6m이다. 평면 구성은 거의 같지만, 장식은 헤라 신전보다 호화롭고, 정면의 원주의 주두와 주각에까지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는 리디아 왕크로이소스의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적어도 몇몇은 그의 기증에 의한 것이다. 양 신전의 영향은 매우 커서, 그 후 수백 년 동안, 소아시아 일대의 신전 설계에서 반복적으로 본보기로 사용되었다[62]

이오니아인은 건축의 장식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고, 이오니아식 건축은 그리스 본토에도 서서히 전달되었지만, 처음에는 이러한 아름다운 무늬와 조각이 채택되었다. 기원전 550년경부터 기원전 525년에 걸쳐 건설된 델포이의 아폴론 신역에 있는 보물고군은, 그리스 본토에 있어서 초기 이오니아식 건축이며, 세련된 장식을 볼 수 있다. 크니도스인의 보물고와 시프노스인의 보물고는 두 주식 신전(디스타일 인 안티스)의 형식이지만, 정면의 2개의 원주는 여성상으로 대체되어 있다. 시프노스인의 보물고의 벽체는 소구와 장변이 서로 반복되고, 그 상부에는 조각이 새겨진 프리즈와 국화 문양이 연속되는 아키트레이브가 얹혀 있다. 입구는 연속된 구슬 장식(비드 앤드 릴)으로 장식되어 있어, 이 작은 건축물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치나 터널, 볼트의 활용 등, 공학적인 진보도 보인다. 이러한 건축적 특성은 그 문화와 영토와 함께 로마 제국에 흡수되어,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로마 건축에 계승되었다.

3. 3.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는 미노아 (기원전 2800년경 ~ 기원전 1100년경), 미케네 (기원전 1500년경 ~ 기원전 1100년경)의 두 주요 문화가 이 지역을 지배했다.[18] 미노아는 크레타 사람들의 문화에 현대 역사가들이 부여한 이름으로, 미노아 궁전과 해양 생물의 모티프로 그려진 도자기로 유명하다. 펠로폰네소스에서 번성했던 미케네 문화는 성채, 요새, 무덤을 건설하고 문어와 해초 대신 행진하는 병사들로 도자기를 장식했다.[8] 이 두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에 멸망했는데, 크레타는 화산 폭발로, 미케네는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멸망했을 가능성이 있다.[8] 이러한 사건 이후에는 마을 수준의 문화만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으며, 이 시기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그리스 신전과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초에는 형성되었지만, 당시의 건축 재료는 목재였다.[18] 기원전 6세기 중기에는 건축 재료로서 본격적으로 돌이 사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는 도리아식이 발전하고,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식 건축이 각각 발전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식은 스타일로바테스 위에 직접 원주가 올려지기 때문에 기반을 갖지 않으며, 주두는 원형의 접시형 에키누스와, 사각형의 아바쿠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63]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도리아식이 채택되었지만, 그리스 본토의 전통에 구속되지 않고 상당히 독자적인 건축 활동을 하였다. 클레오메네스와 에피클레스에 의한 시라쿠사이의 오르티기아 섬에 있는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57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구조가 석조로 바뀐 최초의 그리스 신전 중 하나이다.

셀리누스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인 G 신전은 폭 49.5m, 깊이 108.9m의 거대한 신전으로, 기원전 520년에 기공되었다. 열주에 의해 3등분된 3랑식이다. 노천이 된 내진에는 작은 신전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 점은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이오니아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파에스툼의 제1 헤라 신전은 기원전 565년 혹은 기원전 53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주식 신전이지만, 정면의 원주는 짝수가 아닌 홀수(9개)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의 축에 한 줄의 열주가 통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때문에 내진은 2랑이다.

그리스 본토에서의 도리아식 건축은 기원전 7세기경, 아직 건축이 돌이 아닌 목조였던 시기에 완성되었다. 코린토스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아고라에 인접하여 기원전 6세기 중기에 건설된 아폴론 제II 신전은 현재도 몇 개의 기둥이 남아 있지만, 정면과 측면의 기둥 스팬이 다르며, 또한, 모서리 부분의 기둥 간격은 다른 곳보다 조금 좁아져 있다.

케르키라의 아르테미스 신전도, 기원전 585년경 혹은 기원전 580년경에 건설된, 석조로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 신전 중 하나이다. 신전의 보존 상태는 극히 불량하지만, 크기는 폭 22.4m, 깊이 47.9m이며, 유사 2중 주주식 평면을 가지며, 내진은 열주에 의해 3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신전을 특히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페디먼트에 놓여 있던 고르곤의 거상으로, 이 때문에 "고르곤 신전"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페디먼트를 조각으로 장식한, 알려진 한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4. 건축 양식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이전의 미케네와 미노스 문명의 건축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미노스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몰락하면서 이들의 기술과 양식은 상당 부분 잊혀졌다.[69] 미케네 건축은 왕궁이 있는 성채를 둘러싼 거대한 성곽이 특징이며, 메가론은 중앙에 난로가 있는 직사각형 홀로, 궁전과 큰 집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크레타의 미노스 건축은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기둥과 보를 사용하는 형태였지만, 목재 기둥은 아래가 좁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로 도리스 양식과는 매우 달랐다.[73]

고대 그리스 건축은 주로 신전과 같은 공공 건축물 위주로 발전했으며,[67] 가장 형식적인 유형의 건축물들은 세 가지 고전 건축 양식으로 구분된다. 이는 로마의 건축 저술가 비트루비우스가 처음 설명했다. 세 가지 양식은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토스 양식이며, 이 이름들은 그리스 세계 내에서의 지역적 기원을 반영한다. 이 세 양식은 주로 기둥 머리(주두)로 가장 쉽게 구별할 수 있지만, 기둥, 엔타블러처, 박공, 기단의 형태, 비율, 세부 사항 및 관계도 규정했다.[67]

일반적인 그리스 신전과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초에는 형성되었지만, 당시의 건축 재료는 목재였다.[64] 기원전 6세기 중기에는 건축 재료로서 본격적으로 돌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는 도리스 양식이,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 양식 건축이 각각 발전했다.

기원전 5세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석조 기술이 고도로 활용되었고, 도리스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의 전통이 융합되면서 그리스 건축은 완성되었다.[64]

4. 1. 도리스 양식 (Doric Order)

도리스 양식은 특징적인 기둥머리(주두)로 구분할 수 있다. 기둥머리의 '에키누스'는 기둥 꼭대기에서 시작해 사각형 '아바쿠스'까지 이어지는 둥근 쿠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인방석이 놓인다. 초기에는 에키누스가 납작하고 넓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고 곡선이 강해졌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작아지고 옆면이 직선적으로 변했다.[87] 도리스 기둥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엔타시스(배흘림)로, 기둥 윤곽이 미세하게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이는 기둥이 오목해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87] 이러한 특징은 초기 작품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도리스 기둥에는 대부분 세로 홈(플루팅)이 파여 있다. 홈은 기둥 전체를 따라 나 있으며 보통 20개지만, 때로는 그보다 적을 수도 있다. 이 홈들이 만나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아리스'라고 부른다. 기둥 꼭대기, 가장 좁은 부분 바로 아래에는 이 아리스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가로 홈이 있는데, 이를 '히포트라켈리온'이라고 한다. 도리스 기둥은 대부분 기둥 받침이 없으나,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몇몇 예외가 있었다.[87]

시라쿠사의 아폴로 신전 같은 초기 도리스 신전의 기둥은 높이와 밑면 지름의 비율이 4:1에 불과했고, 기둥 높이와 엔타블러처의 비율은 2:1이었으며, 세부 장식도 꽤 투박했다. 이후 기둥 높이와 지름의 비율이 6:1로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기둥 높이와 엔타블러처의 비율이 약 3:1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도리스 양식 특유의 견고함과 남성적인 특징은 사라졌고, 가늘고 홈이 없는 기둥의 높이와 지름 비율이 7.5:1까지 늘어났다.[87]

도리스 양식의 엔타블러처아키트레이브, 프리즈, 코니스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키트레이브는 기둥 사이를 잇는 석재 인방으로, 각 아바쿠스 중앙 위에서 이음새가 생긴다. 그 위에 프리즈가 놓이는데, 이는 주요 조각 장식 구역 중 하나다. 프리즈는 '트리글리프'와 '메토프'로 나뉘며, 트리글리프는 이 건축 양식의 목조 기원을 상기시킨다. 각 트리글리프에는 기둥의 홈과 비슷한 세 개의 세로 홈이 있고, 그 아래에는 마치 연결된 듯한 '구태'가 있어 트리글리프를 아래의 아키트레이브와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87] 트리글리프는 각 기둥머리 중앙과 각 인방 중앙 위에 위치한다. 하지만 건물 모서리에서는 트리글리프가 기둥 중앙 위에 오지 않는다. 고대 건축가들은 이런 겉보기의 '규칙'에 실용적으로 접근해, 건물 양쪽 끝의 마지막 두 메토프의 너비를 간단히 늘렸다.

코니스는 복잡한 몰딩으로 이루어진 좁고 돌출된 띠로, 장식된 프리즈를 덮어 보호한다. 이는 목조 지붕의 처마와 비슷하다. 아랫면에는 '뮤튤'이라 불리는 돌출 블록으로 장식되어 있어 목조 원형의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 건물 양쪽 끝에서는 박공이 코니스에서 솟아오르며, 비슷한 형태의 몰딩으로 테두리가 만들어진다.[87]

박공은 초기에는 부조 형태의 조각으로 장식되었지만, 파르테논 조각에 이르러서는 거의 독립적인 조각에 가까워졌다. 초기 건축 조각가들은 좁아지는 삼각형 공간에 만족스러운 조각 구성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88] 초기 고전 시대에 이르러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기원전 486-460년) 장식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중앙의 서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뒷다리로 선 켄타우로스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각 부분의 크기와 각도에 맞춰 쓰러지거나, 무릎을 꿇거나,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89]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기원전 448-432년)의 공간을 신들의 복잡한 구성으로 채웠는데, 이들은 옷을 입거나 벗은 채로 숭고한 휴식과 우아함을 보여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도리스 양식의 고대 그리스 신전 부분:

4. 2. 이오니아 양식 (Ionic Order)

이오니아 양식은 볼루트가 있는 기둥머리로 구별된다. 이 기둥머리에는 도리스 양식과 비슷한 형태의 곡선형 '에키누스'가 있지만, 양식화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 위에는 수평 띠가 있어 양쪽으로 말려 내려가 노틸루스 조개 껍데기나 숫양의 뿔과 비슷한 나선 모양 또는 '볼루트'를 형성한다. 평면도상에서 기둥머리는 직사각형 모양이다. 정면에서 보도록 설계되었지만, 건물 모서리의 기둥머리는 추가 나선이 있어 인접한 두 면에서 균형 잡힌 모습을 보인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서는 네 면이 모두 정면인 이오니아 기둥머리가 흔해졌다.[90]

이오니아 양식은 도리스 양식과 마찬가지로 목조 건축에서 유래한 흔적을 보인다. 기둥 위에 평평한 목재판을 가로로 펼치는 것은 목조 건축에서 흔한 방식이다. 이는 가는 기둥에 인방을 받치는 더 넓은 면적을 제공하고, 동시에 인방 자체의 하중 지지력을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기둥에는 항상 받침이 있는데, 이는 목조 건축에서 하중을 분산시키고 비교적 가는 기둥의 밑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90]

기둥에는 좁고 얕은 홈이 파여 있는데, 이 홈들은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만나지 않고 그 사이에 평평한 띠 또는 '필렛'이 있다. 보통 24개의 홈이 있지만 44개까지 있을 수 있다. 기둥 받침에는 '토러스'라 불리는 두 개의 볼록한 몰딩이 있고, 후기 헬레니즘 시대부터는 '아바쿠스'와 비슷한 정사각형 밑판 위에 놓였다.[90]

이오니아 양식의 아키트레이브는 때로 장식이 없지만, 더 자주 겹쳐진 목재판처럼 바깥으로 단계적으로 돌출된 세 개의 띠로 이루어진다. 연속된 띠로 이어지는 프리즈는 작은 돌출 블록들의 열로 다른 부재들과 구분된다. 이를 덴틸이라고 하는데, "이빨"이란 뜻이지만 그 기원은 분명히 목조 구조물의 지붕을 받치던 좁은 나무 널빤지에서 찾을 수 있다.[90]

이오니아 양식은 전체적으로 도리스 양식보다 가벼워 보인다. 기둥은 받침과 기둥머리를 포함해 지름의 9배 높이이며, 전체 엔타블러처도 도리스 양식보다 훨씬 좁고 가볍다. 장식의 분포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달걀과 화살이라고 알려진 교대 형태와 같은 정형화된 무늬 띠는 덴틸 띠와 함께 이오니아 엔타블러처의 특징이었다. 외부 프리즈에는 종종 연속된 형상 조각이나 장식 띠가 있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건물 외부가 아닌 '나오스'의 상부 주변에 장식적인 프리즈가 있었다. 이러한 이오니아식 프리즈는 파르테논과 같은 도리스 양식 건물에서도 발견된다. 에페소스아르테미스 신전처럼 각 기둥의 아래쪽 원통부 주위에 인물 프리즈가 있고, 이를 굵은 몰딩으로 홈 파인 부분과 구분한 신전들도 있다.[90]

주름진 옷을 입은 여성상인 카리아티드(여상주)는 엔타블러처를 받치는 지지대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오니아 양식의 특징으로, 기원전 525년경의 델포이의 시프노스 보물고와 기원전 410년경의 에레크테이온 등 여러 건물에서 나타난다.[91]

기원전 5세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석조 기술이 고도로 활용되었고,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의 전통이 융합되면서 그리스 건축은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64]

기원전 6세기 말, 소아시아와 교역을 하던 이탈리아 남부에 이오니아 양식이 전해졌으며, 파이스툼의 헤라 제1 신전의 세부 장식에서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입은 기원전 500년경에 건설된 아테네 신전의 내진 전주에서였다. 남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와 교류가 깊었던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경에 이오니아 양식을 도입하게 되었고, 기원전 450년경에는 아티카에서 최초의 이오니아 양식인 여신 데메테르의 신전(현재는 소실)이 건설되었다. 이오니아 양식은 건축을 우아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이오니아인 특유의 미의식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아테네에서도 이것이 받아들여져 독자적으로 편승되어 표현되었다.

기원전 437년부터 기원전 433년에 건설된 프로필레아는 아크로폴리스의 유일한 입구이며, 이미 미케네 시대부터 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중앙 통로 부분을 약간 넓힌 도리아식 오더의 열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부 통로는 이오니아식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서면 남쪽의 단상에는 프로필레아의 도리아식과 대조를 이루는 여신 니케 아프테로스(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의 신전이 세워져 있다. 이 아테네 니케 신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시적으로 수습되고, 아크로폴리스 재건 계획이 최종 단계에 접어든 기원전 427년에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칼리아스의 평화)를 기념하여 건설된 것이다.[65] 폭 4.13m, 깊이 3.83m의 이오니아식 소신전으로, 앞뒤 모두 전주식 평면을 가진 앙피-프로스타일이라고 불리는 형식이다. 원주와 내진을 둘러싼 벽은 모두 반원형의 토루스를 가진 기단 위에 놓여 있고, 부조를 새긴 프리즈를 그 상부에 둘러, 정면 및 배면, 그리고 측면을 통일하고 있다. 또한 신전 하부의 아크로폴리스의 성벽 가장자리에도 여신의 부조가 설치되었다. 아테네 니케 신전과 같이, 소규모 건축에 이오니아식 오더를 사용하고, 조각 등으로 장식하는 수법은 기원전 4세기경에 장례 건축에 응용되게 된다.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신성한 장소이며, 아테네 니케 신전과 같은 시기에 기공된 에레크테이온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재개로 인해 기원전 409년까지 공사가 중단되었고, 완공된 것은 기원전 406년이다. 종교 행사를 하는 기능상, 그 이전의 신전보다 복잡한 평면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몇 가지 복원안이 있다. 기초 외에는 펜텔리콘산 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지만, 프리즈는 엘레우시스산 청회색 석회석으로, 표면에 대리석 부조를 못 박아 고정했다. 입구는 정면에 해당하는 동쪽과 북쪽에 설치되었고, 북쪽 입구는 부지의 고저차로 인해 동쪽보다 낮으며, 그 포치는 건물 본체에서 서쪽으로 빗나가게 설치되어 있다. 남면에는 서쪽 끝에 카리아티데스(여성상형 기둥)을 가진 연단이 있지만, 특히 대칭성이나 전체적인 질서는 의식되지 않았고, 건축으로서는 통일성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형적인 평면의 건물에 이오니아식을 채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오니아식의 조화성과 형태의 자유로움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이 되면, 이오니아 양식의 영향은 그리스 본토에 미치지만, 소아시아의 것과 비교하면 주초의 형식이나 프리즈의 유무, 딘틸의 유무 등 차이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일반적이 되는 이오니아 양식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본토에서 형성된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장식성이 높은 이오니아 양식은, 도리아식보다 세부의 변화가 크고, 기원전 5세기 말부터 발전하는 코린트식 오더는, 아티카풍 이오니아식 오더의 발전 형태라고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건축의 코린트식은 오더로서의 독립성이 부족하고, 도리아식 기둥에 채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6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바세 신역의 아폴론 에피쿨리우스 제4 신전은, 기원전 5세기 말에 건설된, 폭 14.4m, 전체 길이 37.8m의 주주식 신전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이크티노스가 설계한 것으로 하고 있지만, 엔타시스나 세부의 비례는 파르테논만큼 정밀하지 않다. 외부의 원주는 도리아식이나, 내진은 매우 개성적이며, 덧붙여진 기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돌출된, 거의 벽과 같은 이오니아식 기둥형이 늘어섰다. 이러한 벽 부착 이오니아식은, 아마도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실례일 것이다. 또한, 내진의 중앙에는 한 개의 코린트식 원주가 설치되었지만, 이 코린트식에 대해서도, 신전에 채용된 것으로서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4. 3. 코린토스 양식 (Corinthian Order)

코린토스 양식은 목조 건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이오니아 양식에서 직접 발전했으며, 초기에는 스타일과 비율이 거의 같았지만 더 화려한 주두가 특징이다.[92] 주두는 도리스 양식이나 이오니아 양식보다 훨씬 깊었는데, 큰 '크라테르'(종 모양의 혼합 그릇) 형태로, 이중으로 배열된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되었다. 그 위로 덩굴 모양의 소용돌이가 올라가 아바쿠스의 모서리를 받쳤는데, 아바쿠스는 완벽한 정사각형이 아니라 위로 퍼지는 형태였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이 주두는 코린토스의 청동 주조공 칼리마코스가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무덤 위에 놓인 공물 바구니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 바구니 위에는 물건을 보호하는 평평한 타일이 있었고, 바구니는 주변에 자란 아칸서스 식물의 뿌리 위에 놓여 있었다.[92] 기둥 높이와 지름의 비율은 보통 10:1이며, 주두가 전체 높이의 1/10 이상을 차지한다. 주두 높이와 지름의 비율은 대체로 1.16:1 정도다.[92]

코린토스 양식은 처음에는 바사이의 아폴로 에피쿠리오스 신전과 같이 실내에서 사용되었다(기원전 450-425년경). 기원전 334년에 아테네의 리시크라테스 기념비에서 외부 특징으로 처음 나타났고, 이후 아테네의 제우스 올림피아 신전(기원전 174년-서기 132년)에서 대규모로 사용되었다.[92] 로마인들이 이 양식을 널리 퍼뜨렸고, 여러 가지 세련된 요소와 장식적 세부사항을 추가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때때로 홈이 없는 코린토스 기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92]

5. 주요 건축물 유형

고대 그리스 건축의 주요 건물 유형으로는 신전, 극장,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스토아 등이 있다.

그리스어로 가족이나 가구를 뜻하는 ''오이코스''는 집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기 주택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에 박공이 있는 열린 현관, 즉 프로나오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이러한 형태는 신전 건축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많은 주택은 햇볕에 말린 흙벽돌 벽이나 짚, 해초 등으로 채워진 나무 골조를 사용했으며, 석재 기단 위에 흙이나 석고로 덮었다.[4] 지붕은 짚으로 덮고 처마를 돌출시켰다. 델로스의 주택과 같은 대형 주택은 돌로 짓고 석고를 발랐으며, 부유한 주택에는 모자이크 바닥이 있었다.

주택은 빛과 공기를 들이는 작은 안뜰로 열리는 넓은 통로("파스타")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대형 주택에는 페리스틸(주랑)이 있는 중앙 안뜰이 있었고, 일부 주택에는 가족 여성용 위층이 있었다.[17] 도시 주택은 인접한 벽으로 지어졌고 좁은 거리로 나뉘었으며, 상점이 거리를 향한 방에 위치하기도 했다. 도시 주택은 중앙 안뜰을 향해 개방되었다.[18]

에피다우로스의 경기장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에는 도시 계획이 중요해졌으며, 파이스툼과 프리에네 같은 도시는 격자형 거리와 스토아로 둘러싸인 아고라를 갖추었다. 아탈로스의 스토아아테네에서 볼 수 있다. 규칙적인 도시 계획은 밀레투스의 히포다무스와 관련이 있다.[25][23][22]

공공 건물은 서로 건축적으로 관련되도록 배치되었다.[23] 프로필론은 신전 성소 등의 입구를 형성했으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레아가 대표적이다. 불레우테리온은 법원과 불레(도시 의회)의 회의 장소였으며, 아테네, 올림피아, 밀레토스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24]

모든 그리스 도시에는 야외 극장이 있었으며, 공공 회의와 연극 공연에 사용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에피다우로스 극장이다.[25]

규모가 큰 그리스 도시에는 팔라이스트라 또는 체육관이 있었고, 경마를 위한 경마장, 육상 경기를 위한 경기장도 있었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1896년, 1906년, 2004년 올림픽 경기에 사용되었다.[24][26]

5. 1. 신전 (Temple)

위: 1. ''안티스식 이주주'', 2. ''안티스식 양주주'', 3. ''톨로스'', 4. ''전주식 사주주'', 5. ''양전주식 사주주'',
아래: 6. ''양익주식 팔주주'', 7. ''주주식 육주주'', 8. ''의주주식 육주주'', 9. ''의양익주식 팔주주'']]

고대 그리스 신전은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너비보다 길이가 약 두 배 정도 길었다. 아테네 올림피안 제우스 신전처럼 예외적으로 너비의 2.5배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신전 구조물은 원형이며, 이를 ''톨로스''라고 부른다.[35]

크기별 신전 분류는 다음과 같다.

  • 소형 신전: 길이 25미터(약 75피트) 미만, 원형 톨로스는 지름 25미터 미만.
  • 중형 신전: 대부분의 신전이 해당되며, 길이 30~60미터(약 100~200피트).
  • 대형 신전: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소수의 도리아식 신전으로, 길이 60~80미터(약 200~260피트).
  • 초대형 신전: 아그리젠토 올림피안 제우스 신전을 포함한 주로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 신전으로, 길이 90~120미터(약 300~390피트).


신전은 계단식 기단 또는 스티로베이트 위에 세워져 지면보다 높게 구조물을 올렸다.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과 같은 초기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었지만, 파르테논 신전처럼 대부분 세 개의 계단을 가졌으며,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과 같이 예외적으로 여섯 개의 계단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36]

건물의 핵심은 석조로 지어진 "나오스"이며, 그 안에는 신의 조각상을 모시는 창문 없는 방인 셀라가 있었다. 셀라는 보통 앞에 현관 또는 "프로나오스"를 가지고 있었고, 보물, 전리품, 선물을 보관하는 "안테나오스"라는 두 번째 방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이 방들은 쇠창살이 달린 커다란 출입구 하나로 빛을 받았으며, 일부 방은 채광창으로 조명이 켜졌던 것으로 보인다.[36]

스티로베이트 위에는 종종 나오스를 완전히 둘러싸는 열주가 세워졌다. 각 신전은 두 가지 용어로 정의되는데, 하나는 입구 정면에 있는 기둥의 수를, 다른 하나는 기둥의 분포를 설명한다.[36]

신전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안티스식 이주주'': 람누스의 네메시스 신전처럼 프로나오스 또는 현관의 돌출된 벽 사이에 기둥 두 개가 있는 작은 신전. (위 그림 1 참조.) [35]
  • ''양전주식 사주주'': 나오스에서 떨어져 양쪽에 기둥이 있는 작은 신전. ''사주주''는 아테네의 일리소스 신전처럼 기둥이 네 개임을 나타낸다. (그림 4 참조.) [35]
  • ''주주식 육주주'': 아테네의 테세이온처럼 나오스 주위에 단일 열의 기둥이 있고 정면에 기둥이 여섯 개인 신전. (그림 7 참조.) [35]
  • ''주주식 팔주주'': 나오스 주위에 단일 열의 기둥이 있는 신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정면에 기둥이 여덟 개 있다. (그림 6과 9 참조.) [35]
  • ''양익주식 십주주'': 입구 정면에 기둥이 열 개 있고 나오스가 이중 열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디디마의 거대한 아폴론 신전. (그림 6 참조.) [35]
  • ''의주주식 칠주주'': 아그리젠토의 제우스 올림푸스 신전처럼 신전을 둘러싼 열주가 나오스 벽에 부착된 "의사" 기둥을 가진 신전. ''칠주주''는 입구 정면에 기둥이 일곱 개 있음을 의미한다. (그림 8 참조.)[35]


5. 2. 극장 (Theater)

기원전 5세기 중기에 석조 기술이 고도로 활용되면서,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전통이 융합되어 그리스 건축은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전기 그리스는 완벽한 비례 법칙을 갖춘 웅장한 건축물을 창조하여 고전 건축의 원천이 되었다.[64] 이나 극장 등 공공 건축은 크게 발전했지만, 개인 저택 등 사적 건축물은 큰 발전이 없었다.

5. 3. 아고라 (Agora)

스토아는 그리스인들이 선호한 건축물로, 바깥쪽으로 열주(列柱)를 가진 회랑(回廊) 형태의 단순한 건물이다. 스토아는 비를 피하고 햇빛을 가려주는 장소로 제공되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 신역(神域)이나 아고라에 설치되었다.

아테네 아고라에 있었던 제우스의 스토아는 요자형(凹字形) 이랑형식(二廊形式)의 건물이었다.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키레는 폴리그노토스와 미콘이 그린 벽화로 유명했다. 아테네에서는 완전히 복원된 아탈로스의 스토아를 볼 수 있다.

5. 4. 기타 공공 건축물

헬레니즘 시대에 짐네지움(체육관)은 옥외 운동을 위한 노천 체육장을 의미했다. 델포이에서 발견된 기원전 4세기 체육관 유적은 산 경사면을 깎아 만든 2단 대지 위에 세워졌다. 상단에는 쿠시스토스(주랑 트랙)와 파라드로미스(노천 트랙)가, 하단에는 르토론(원형목욕실)을 포함한 체육시설이 있었다.

권투나 반크라티온 연습은 팔라이스트라라는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올림피아의 팔라이스트라는 41m2 운동장을 도리스식 주랑으로 둘러싸고, 바깥쪽에 여러 방이 있었다. 델로스, 프리에네, 에피다우로스, 페르가몬 등지에서도 유사한 팔라이스트라 유적이 발견되었다.

스토아는 그리스인들이 선호한 건축물로, 열주를 가진 회랑식 건물이다. 신역(神域)이나 광장(아고라)에 세워져 비와 햇빛을 피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사모스섬 헤라 신역, 아테네 아고라의 제우스의 스토아, 폴리그노토스와 미콘의 벽화로 유명한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키레 등이 উল্লেখযোগ্য 유적이다.

불레우테리온은 그리스 도시 대의원 회의장으로 사용된 회랑이다. 올림피아의 불레우테리온은 경기자들이 규정 준수를 맹세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두 채의 날개와 작은 가운뎃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건물은 건조 연대가 다르며, 이오니아식 주랑이 전면에 늘어서 있었다.

프리타네이온은 행정기관 본부로, 관리들의 집회, 식사, 숙박 장소로 사용되었다. 프리에네의 프리타네이온은 개인 주택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신전은 그리스 공공 건축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며, 메가론에서 유래되었다.[19] 신전은 신상의 위치, 보물 창고, 봉헌물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천문학적으로 방향이 맞춰졌다.[20]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전의 위치가 "멀리 널리 보이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2] 톨로이라 불리는 작은 원형 신전도 건설되었다.[21]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에는 도시 계획이 중요해졌으며, 파이스툼과 프리에네 같은 도시는 격자형 거리 구조와 스토아로 둘러싸인 아고라를 갖추었다. 아테네에는 복원된 아탈로스의 스토아가 있다. 규칙적인 도시 계획은 밀레투스의 히포다무스와 관련이 있다.[25][23][22]

공공 건물은 서로 건축적으로 관련되도록 배치되었다.[23] 프로필론은 신전 성소 등의 입구를 형성했으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레아가 대표적이다. 불레우테리온은 법원과 불레의 회의 장소였다. 아테네, 올림피아, 밀레토스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24]

그리스 도시에는 야외 극장이 있었으며, 공공 회의와 연극 공연에 사용되었다. 에피다우로스 극장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25]

규모가 큰 도시에는 팔라이스트라 또는 체육관이 있었고, 경마를 위한 경마장, 육상 경기를 위한 경기장도 있었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1896년, 1906년, 2004년 올림픽 경기에 사용되었다.[24][26]

기원전 5세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 건축은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전기 그리스는 웅장한 건축물을 창조하여 고전 건축의 원천이 되었다.[64] 공공 건축은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건축은 기둥의 지름, 높이, 기둥 간격, 그리고 신전의 높이, 폭, 길이에 질서 있는 비례 관계가 사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엄격한 모듈 규정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더욱 엄격한 비례 관계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비례 관계는 이오니아식 오더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지만, 도리아식 오더는 문제가 발생했다. 마그네시아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설계한 건축가 헤르모게네스는 이오니아식 오더를 선호했다. 헬레니즘 건축에서는 도리아식 오더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6. 건축 기술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문과 창문 개구부는 인방으로 연결되었는데, 석조 건축에서는 개구부의 너비가 제한되었다. 기둥 사이 간격도 인방의 영향을 받았으며, 석조 인방을 쓰는 외부 기둥은 목재 인방을 쓰는 내부 기둥보다 간격이 좁았다.[76][77] 문과 창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77] 신전에는 창문이 없었고, 나오스 내부로 들어오는 빛은 문을 통해서만 들어왔다. 일부 신전은 지붕에 개구부를 설치하여 빛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76] 에렉테이온의 이오니아 양식 문은 몰딩과 콘솔 브래킷으로 지탱되는 엔타블러처 등 많은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77][78][79]

신전 내부에서 가장 넓은 공간은 나오스였다. 큰 건물에서는 하이포스타일 양식으로 기둥을 설치하여 지붕을 지탱했다. 초기 그리스 건축은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대각선 트러스 개념이 없었다. 기원전 6세기 신전 건축에서는 나오스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이 외벽보다 높이 솟아 있었는데, 이는 목재 지붕 트러스가 있었다면 불필요한 설계였다. 초기에는 모든 서까래가 엔타블러처, 벽, 하이포스타일에 직접 지지되었고, 목재 트러스 프레임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야 도입되었다.[74]

고대 그리스 건축물은 목재, 점토, 석고 등으로 지어졌으며, 초기에는 초가 지붕이 사용되었다. 석조 건축이 등장하면서 구운 세라믹 지붕 타일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초기 지붕 타일은 S자 모양으로, 판과 덮개 타일이 한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이 타일들은 길이 90cm, 너비 70cm, 두께 3cm에서 4cm, 무게 30kg 정도로 현대의 지붕 타일보다 훨씬 컸다.[80] 타일 지붕은 무거웠기 때문에 흙벽돌과 목재 벽 대신 강한 석조 벽이 필요했다.[81]

최초의 지붕 타일은 코린토스 인근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700년에서 650년 사이에 아폴론과 포세이돈 신전에서 초가지붕을 대체했다.[82] 이후 50년 이내에 그리스 본토, 서부 소아시아, 남부 및 중부 이탈리아 등 동부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82] 지붕 타일은 생산 비용과 노동력이 더 많이 들었지만, 내화성 덕분에 신전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82] 또한, 석조와 타일 건축의 도입으로 인해 진흙벽돌 벽을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붕 처마를 길게 뺄 필요가 없어졌다.[81]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는 아치궁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미케네 시대 무덤에서 '벌집' 형태 돔이 사용되었고, 기원전 5세기부터 엑세드라 같은 외부 요소에 키스톤이 사용되었지만, 그리스에서는 로마와 달리 돔과 볼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74]

6. 1. 석조 기술

고대 그리스 건축은 수직 기둥(post)이 수평 대들보(lintel)를 지탱하는 가구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고대 건축물은 돌로 지어졌지만, 이 양식의 기원은 수직 기둥이 지붕을 지탱하는 단순한 목조 구조물에 있는 것이 명백하다. 기둥과 대들보는 벽을 규칙적인 구획으로 나누었고, 이 구획들은 개방된 상태로 두거나 햇볕에 말린 벽돌, 격자 또는 짚으로 채워지고 점토나 석고로 덮었다. 또는 그 공간을 돌로 채우기도 했다.[74]

초기 신전들은 목조 구조였으나, 이후 더 내구성이 있는 돌 신전으로 대체되었는데, 원래 목재 구조의 흔적은 돌 건축물에서도 유지되었다.[75]

돌 기둥은 원통형의 단단한 돌(드럼)을 모르타르 없이 쌓았는데, 드럼 안쪽에 청동 못으로 고정해서 중심을 맞추기도 했다. 기둥은 상단보다 하단이 더 넓고, 가운데가 약간 부풀어 오른 모양새의 엔타시스(배흘림 기둥) 형태를 채택하기도 했다. 각 기둥에는 주두(기둥 머리)가 있으며, 사각형 상단부는 "아바쿠스"라고 한다. 기둥 자체에서 상승하는 주두 부분은 에키누스라고 하는데, 양식에 따라 다르다. 도리스 양식에서는 단순하고, 이오니아 양식에서는 홈파기가 있으며, 코린토스 양식에서는 아칸서스 잎 모양이 있다. 도리스식이나 이오니아식 기둥에 나타나는 홈파기는 목조 건축의 요소를 유지한 것이다.[75]

모든 신전은 크레피도마라고 불리는 석조 기초 위에 놓였으며, 그중 기둥을 지탱하는 상단부는 스타일로베이트이다. 기원전 약 600년경부터 신전에 석조 벽이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에는 잡석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석조가 사용되었는데, 신전 벽에는 규칙적인 층과 큰 크기로 이음매를 최소화한 최상의 절단석 석조가 주로 사용되었다.[74] 석재는 거칠게 깎아 채석장에서 끌어오고, 매우 정밀하게 잘라지고 배치되었으며, 모르타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기둥과 하중을 지탱하는 건물 부분의 블록은 특히 철제 클램프, 나무, 청동 또는 철제의 핀과 막대를 납에 고정하여 부식을 최소화하면서 고정되거나 보강되었다.[69]

문과 창의 개구부는 인방을 가로지르며, 석조 건축물에서는 개구부의 가능한 너비가 제한되었다. 기둥 사이의 거리는 인방의 특성에 따라 유사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석조 인방을 지탱하는 외부 기둥은 목재 인방을 지탱하는 내부 기둥보다 더 좁게 배치되었다.[76][77] 문과 창의 개구부는 위로 갈수록 좁아졌다.[77]

6. 2. 구조 기술

고대 그리스 건축은 수직 기둥(post)이 수평 대들보(lintel)를 지탱하는 가구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고대 건축물은 돌로 지어졌지만, 이 양식은 수직 기둥이 지붕을 지탱하는 단순한 목조 구조물에서 기원했다. 기둥과 대들보는 벽을 규칙적인 구획으로 나누었고, 이 구획들은 개방하거나 햇볕에 말린 벽돌, 격자 또는 짚으로 채우고 점토나 석고로 덮거나, 돌로 채웠다.[74]

초기 신전들은 목조 구조였으나, 이후 더 내구성이 있는 돌 신전으로 대체되었고, 그중 많은 건축물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원래 목재 구조의 흔적은 돌 건축물에서도 유지되었다.[75] 이 신전 중 일부는 매우 커서, 아테네의 제우스 올림피아 신전과 같이 약 91.44m 이상의 길이를 가진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보다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파우사니아스가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을 묘사한 바에 따르면, 대형 신전은 처음에 목조 건축물로 지어졌다가 후대에 돌이 사용 가능해짐에 따라 기둥이 하나씩 교체되었다.[67]

돌 기둥은 원통형의 단단한 돌(드럼)을 모르타르 없이 쌓았는데, 드럼 안쪽에 청동 못으로 고정해서 중심을 맞추기도 했다. 기둥은 상단보다 하단이 더 넓고, 가운데가 약간 부풀어 오른 모양새의 엔타시스(배흘림 기둥) 형태를 채택하기도 했다. 각 기둥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주두(기둥 머리)가 있으며, 사각형 상단부는 아바쿠스라고 한다. 기둥 자체에서 상승하는 주두 부분은 에키누스라고 한다. 이것은 양식에 따라 다르며, 도리스 양식에서는 단순하고, 이오니아 양식에서는 홈파기가 있으며, 코린토스 양식에서는 아칸서스 잎 모양이 있다. 도리스식이나 이오니아식 기둥에 나타나는 홈파기는 목조 건축의 요소를 유지한 것이다.[75]

신전의 기둥 위에는 엔타블러처와 페디먼트가 있다. 엔타블러처는 지붕을 지탱하고 건물 전체를 둘러싸는 주요 수평 구조 요소로, 아키트레이브, 프리즈, 코니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키트레이브는 기둥 위에 놓여 기둥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기둥의 중심 바로 위에서 접합된다. 프리즈는 건물의 주요 장식 요소 중 하나로 조각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오니아와 코린토스 양식에서는 부조 장식이 연속적인 띠 형태로 이어지지만, 도리스 양식에서는 트리글리프라고 불리는 수직 직사각형 블록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메토프라는 섹션으로 나뉜다. 트리글리프는 도리스 기둥처럼 수직으로 홈이 파여 있으며, 한때 지붕을 지탱했던 목재 들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코니스는 엔타블러처의 상단 띠로, 하단 가장자리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건물의 각 끝에서 한때 목재 지붕을 지지했던 들보의 형태를 유지한다. 각 신전의 앞면과 뒷면에서 엔타블러처는 페디먼트라는 삼각형 구조를 지탱한다. 팀파눔은 페디먼트에서 코니스로 둘러싸인 삼각형 공간으로, 건물 외부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 장식이 위치한 곳이다.

6. 3. 지붕 기술

신전 지붕에서 가장 넓은 부분은 내부 방인 나오스이다. 큰 건물에서는 내부 공간에도 기둥이 있어 지붕을 지탱했는데, 이러한 건축 양식을 하이포스타일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은 처음에 목재로 지어졌으나, 초기 건축가들은 대각선 트러스를 안정화 부재로 사용하는 개념이 없었다. 이는 기원전 6세기의 신전 건축에서 드러나는데, 이때 나오스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외벽보다 높이 솟아 있어 지붕 트러스가 목재 지붕의 필수 요소로 사용되었다면 이런 설계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초기에는 모든 서까래가 엔타블러처, 벽, 하이포스타일에 직접 지지되었으며, 목재 트러스 프레임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야 그리스 건축에 도입되었다.[74]

목재, 점토 및 석고로 지어진 고대 그리스 건축물은 아마도 초가 지붕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석조 건축의 부상과 함께 구운 세라믹 지붕 타일이 등장했다. 초기의 이러한 지붕 타일은 S자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판과 덮개 타일이 한 조각으로 형성되었다. 이 타일들은 현대의 지붕 타일보다 훨씬 컸으며, 길이 약 90cm, 너비 70cm, 두께 3cm에서 4cm에 무게는 약 30kg이었다.[80] 타일 지붕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이 지붕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건물 벽은 강해야 했다. 흙벽돌과 목재 벽은 타일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약했으므로 타일 지붕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석조 벽이 필요했다.[81]

그리스 건축에서 최초의 지붕 타일은 코린토스 인근의 극히 일부분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700년에서 650년 사이 아폴론과 포세이돈 신전에서 초가지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82] 빠르게 퍼져나가, 지붕 타일은 50년 이내에 그리스 본토, 서부 소아시아, 남부 및 중부 이탈리아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주변의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게 되었다.[82] 초가지붕보다 생산 비용과 노동력이 더 많이 소요되었지만, 내화성 덕분에 비용이 많이 드는 신전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82] 부수적인 효과로, 새로운 석조와 타일 건축이 도입되면서, 예전에는 벽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돌출 처마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듯하다. 진흙벽돌 벽을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붕 처마를 바깥으로 길게 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81]

아치궁륭은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케네 시대의 무덤에서는 '벌집' 형태의 돔이 사용되었고, 기원전 5세기부터 엑세드라(반원형 또는 반구형의 공간)와 같은 외부 요소에서 키스톤이 쓰이긴 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로마와 달리 돔과 볼트를 별로 쓰지 않았다.[74]

7. 건축 장식

엔타블러처페디먼트는 신전 기둥 위에 위치한다. 엔타블러처는 지붕을 지탱하고 건물 전체를 둘러싸는 주요 수평 구조 요소로, 아키트레이브, 프리즈, 코니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키트레이브는 기둥 사이를 잇는 인방으로 구성되며, 프리즈는 주요 장식 요소이다. 도리스 양식에서는 트리글리프메토프로 나뉘고, 이오니아와 코린토스 양식에서는 연속적인 부조 장식이 새겨진다. 코니스는 엔타블러처의 상단 띠로, 하단 가장자리에 화려한 장식이 있다. 페디먼트는 엔타블러처가 지탱하는 삼각형 구조로, 팀파눔은 코니스로 둘러싸인 삼각형 공간이며 건물 외부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 장식이 위치하는 곳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비례와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원근법과 시각적 착시를 고려하여 건물의 선이 직선이 되지 않도록 조정했다.[85] 특히 기둥은 엔타시스(배흘림)라는 부풀림을 주어 시각적 안정감을 높였다.[74] 파르테논 신전은 이러한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시이다.[89]

초기 목조 구조물은 구워서 채색된 테라코타 판으로 장식되었으며, 기하학적 무늬, 겹치는 패턴, 잎 모티프 등을 포함했다.[93] 석조 신전이 도입되면서 조각 장식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점토 장식물은 지붕, 처마 끝, 모서리, 박공을 장식했으며, 아크로테리온과 안테픽스가 사용되었다. 이오니아식 처마에는 사자 머리 모양의 빗물 배출구가 사용되기도 했다.[76][94]

고대 그리스 건축의 모든 장식은 건축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도리스 양식에서는 조각이 메토프박공에 체계적으로 배치되었고,[93] 후기 이오니아식 건축에서는 몰딩과 장식의 종류와 수가 다양해졌다.[76][78][93] 구슬과 홈, 달걀과 화살 몰딩 등이 사용되었다.[76][93][95]

기원전 5세기 중기에 석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리스 건축은 완성되었고, 고전 건축의 원천이 되었다.[64]

7. 1. 건축 조각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조각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나무로 만들어진 신전에 테라코타를 사용하여 장식했지만, 점차 돌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건물의 비례와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지만, 중간 부분이 약간 부풀어 오르는 엔타시스(배흘림) 형태로 만들어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74] 파르테논 신전은 이러한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다.[89]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은 원기하학, 기하학, 아르카익, 고전 시대로 구분된다. 조각은 엄격 고전, 전성기 고전, 후기 고전으로 나뉜다. 초기에는 도기에서, 이후에는 조각에서 인간 형상의 묘사가 발전했다. 신전 조각은 이러한 발전의 영향을 받아 더욱 정교해졌다.

초기 신전은 테라코타로 장식되었고, 점토 장식은 지붕, 처마, 모서리, 박공을 장식했다. 아크로테리온과 안테픽스가 사용되었고, 이오니아식 처마 장식에는 사자 가면이 사용되기도 했다.[28][45]

고대 그리스 건축의 세 가지 양식(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토스)에서 조각 장식은 필수적이었다. 도리스 양식에서는 메토프박공에 조각이 배치되었다.[44] 후기 이오니아 양식에서는 더 다양한 조각이 사용되었다.

코르푸의 아르테미스 신전 서쪽 박공벽


건축 조각은 아르카이크 양식에서 헬레니즘 양식으로 발전했다.[10] 초기에는 고르곤과 같은 괴물 이미지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인간 형상 묘사가 발전했다.[47]

엄격 고전 양식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박공 조각으로 대표된다. 동쪽 박공은 전차 경주 전의 긴장감을, 서쪽 박공은 라피테스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묘사한다.[50]

파르테논 동쪽 박공의 고전 조각상, 대영 박물관.


파르테논의 프리즈와 박공 조각은 고전 양식의 대표작으로, 피디아스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다. 박공 조각은 올림푸스의 신들을, 프리즈는 파나테나이아 행렬을 묘사한다.[51]

후기 고전 시대에는 티모테오스, 프락시텔레스, 레오카레스, 스코파스 등의 조각가들이 활동했다.[10] 에피다우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는 티모테오스의 조각이 있었다.

헬레니즘 건축 조각은 더욱 화려해졌으며,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페르가몬 제단의 프리즈가 대표적이다.[54]

메토프프리즈여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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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 기타 장식 요소

초기 목조 구조물, 특히 신전은 직사각형 패널과 장식용 원반 형태의, 구워서 채색된 테라코타 판으로 장식되었다. 테라코타 판은 건물을 장식하는 동시에 부분적으로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많은 조각들이 그들이 장식했던 건물보다 오래 남아 있으며, 기하학적 스크롤, 겹치는 패턴 및 잎 모티프의 정형화된 테두리 디자인의 풍부함을 보여준다.[93] 석조 신전이 도입되면서, 이러한 판은 더 이상 보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조각 장식이 더 흔해졌다.

점토 장식물은 건물의 지붕으로 한정되었으며, 처마 끝, 모서리 및 박공 위를 장식했다. 박공의 모서리에서는 아크로테리온이라고 불렸고, 건물의 측면을 따라서는 안테픽스라고 불렸다. 초기 장식 요소는 일반적으로 반원형이었으나, 나중에는 대략 삼각형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종종 야자무늬가 새겨져 있었다.[93][94] 이오니아식 처마 끝에는 종종 입을 벌린 사자의 머리 모양으로 된 빗물 배출구가 달려 있었다.[76][94] 후기 고전기에는 아크로테리온이 때때로 조각된 인물상이 되기도 했다.[103]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단순한 반원형 아스트라갈, 양식화된 잎 모양의 프리즈 또는 박공의 화려한 조각이든, 모든 조각 장식은 건축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도리스 양식에서는 배치에 변화가 없다. 부조는 벽에 임의로 장식되지 않는다. 조각은 항상 도리아식 건축의 메토프와 박공 같은 특정 영역에 체계적으로 배치된다.[93] 후기 이오니아식 건축에서는 특히 출입구 주변에서 몰딩과 장식의 종류와 수가 다양해지며, 에렉테이온처럼 브래킷이 나타나 출입구 위의 장식용 처마를 지지하기도 했다.[76][78][93] 자주 사용되는 좁은 몰딩은 구슬과 홈이라고 하며, 대칭적으로 회전된 목재 원형에서 유래했다. 넓은 몰딩에는 홈이 파여 있고 때로는 끝이 위로 향한 혀 모양 또는 뾰족한 잎 모양을 가진 것과, 타원형과 뾰족한 모양이 교차하는 달걀과 화살 몰딩이 포함된다.[76][93][95]

8. 한국 건축과의 비교 및 영향

고대 그리스 건축은 조선의 건축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적지만, 서양 건축사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건축은 불교 건축의 영향을 받은 사찰 건축과 유교적 이념을 반영한 궁궐, 관아, 향교, 서원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조선의 건축에서는 와요 건축, 다이부츠요, 젠슈요 등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며, 신사 건축에서는 하치만즈쿠리, 곤겐즈쿠리 등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고대 그리스 건축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과 같은 건축 양식(오더)을 확립하여 서양 건축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양식들은 기둥, 주두(기둥머리), 엔타블레이처(기둥 위에 놓이는 수평 구조물) 등의 구성 요소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이며,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건축물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해 서양 건축 양식이 유입되면서, 고대 그리스 건축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등이 그 예시이다.

8. 1. 한국 건축과의 유사점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한국 건축과의 유사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 내용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유지됩니다.

8. 2. 한국 건축과의 차이점

고대 그리스 건축은 조선의 건축과 여러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건축 양식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 건축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등의 오더(Order)를 기반으로 한 신전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 오더는 기둥의 형태, 주두(기둥머리) 장식, 엔타블레이처(기둥 위에 놓이는 수평 구조물)의 구성 등에서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며,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건축물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조선의 건축은 불교 건축의 영향을 받은 사찰 건축과 유교적 이념을 반영한 궁궐, 관아, 향교, 서원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조선의 건축에서는 와요 건축, 다이부츠요, 젠슈요 등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며, 신사 건축에서는 하치만즈쿠리, 곤겐즈쿠리 등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고라, 아크로폴리스와 같이 공공의 목적을 위한 건축물이 발달한 반면, 조선에서는 신덴즈쿠리, 쇼인즈쿠리와 같이 주거용 건축물이 발달하였다.

건축 재료와 기술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대리석과 같은 석재를 주로 사용하고, 엔타시스와 같은 정교한 기법을 통해 건물의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가구식 구조와 단청과 같은 독특한 장식 기법을 발전시켰다.

8. 3. 한국 건축에 미친 영향

고대 그리스 건축은 한국 건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양 건축 양식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 건축 양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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